내사랑 베어스

베어스의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

민우아빠 2007. 4. 19. 10:00
철완 리오스? Sir 리오스!
박동희 기자 / 2007-04-16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와 적지않은 국내 선수들을 실업자로 내몰았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외국인선수 제도가 올해로 10년째를 맞는다. 2007시즌까지 한국땅을 밟은 외국인선수는 모두 233명. 이 가운데 두산 다니엘 리오스(35)는 외국인선수 제도의 가장 성공한 모델로 꼽힌다. 많은 야구팬들은 그를 ‘전라도 용병’ ‘철완 리오스’ 등으로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Sir 리오스’라 부르려 한다. 외국인선수 이전에 리오스는 존경받아 마땅한 야구선수이기 때문이다.
2005년 7월 7일 대구구장. 삼성과 KIA가 벌인 시즌 12차전을 보기 위해 입장한 3,171명의 관중들이 6회말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중뿐만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MBC-ESPN 중계진도 멍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KIA 팬 이병호(34) 씨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며 “그런 장면을 보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과연 그라운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6회초까지 KIA는 삼성에게 1-2로 뒤지고 있었다. KIA 선발투수 리오스는 3회말 2실점했지만 5회말까지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6회말에 박진만과 강동우에게 연달아 안타를 허용하고 3루수 김민철의 실책을 더해 1사 만루 위기에 몰린다. 순간 리오스가 모자를 벗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

1993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이후 프로 13년째인 리오스에게 이런 위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TV 카메라에 잡힌 리오스는 절벽 끝에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내의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리오스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조동찬에게 던진 공이 중월 만루홈런으로 연결된 것이다. KIA 이광우 투수코치가 침통한 표정으로 마운드로 올라가 리오스에게서 공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상한 장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야 할 리오스가 포수 김상훈에게 다가가더니 포옹을 하는 게 아닌가.

“어, 이거 왜 이러지.” 포수 김상훈은 당시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김상훈도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리오스가 퇴출될 거라는 소문이 팀에 퍼져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리오스가 갑자기 포옹을 하니까 아차 싶었다.”

리오스에게 공을 건네받은 이광우 코치도 아차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쉬웠다. 성실하고 좋은 투수였지만 팀 사정상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서운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찡한 기분을 느꼈다.”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고 전해 17승으로 공동다승왕을 차지했던 리오스는 사실상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KIA에서 퇴출된다. 그리고 사흘 후인 7월 10일 두산 전병두, 김주호와 2대1 트레이드로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된다.

KIA 감독을 지낸 MBC-ESPN 김성한 해설위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압축해 설명했다. “리오스는 좋은 투수였다. 그러나 모든 감독은 좀 더 나은 투수를 원하기 마련이다.”

KIA를 떠나야 했던 이유
최고 구속 150Km의 포심패스트볼과 투심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이 리오스의 강력한 무기다.
사진 제공=두산 베어스

2002년 KIA에 입단한 리오스는 그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4승5패 13세이브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했다. 그해 KIA는 리오스의 맹활약 덕에 1997년 이후 5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이듬해에는 30경기 모두 선발로만 출전해 10승13패 평균자책점 3.82를 거뒀다.

리오스의 진가가 발휘된 건 2004년이었다. 그해 17승 8패로 다승 공동 1위, 평균자책점 2.87로 이 부문 4위에 오른 것이다. KIA도 리오스가 입단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나가 KIA 팬들 사이에서 리오스는 어떤 내국인 선수보다 소중한 존재가 됐다.

그러나 4년째 해인 2005년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7월 7일 삼성전 앞까지 18경기에 선발로 나와 6승9패 평균자책점 5.07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이유는 있었다. 전해에 비해 공끝이 무뎌졌고 변화구의 각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그해 리오스의 공이 좋았다고 해도 KIA에 남아있을 확률은 적었다. 리오스의 퇴출은 예정된 것이었다.

“2002년 입단 때부터 코칭스태프는 리오스를 미덥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김성한 감독이 리오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첫해 기대 이상으로 잘 던졌는데도 이듬해 구단에 ‘재계약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리오스가 부진했던 2003년에는 수시로 다른 외국인투수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KIA 구단 관계자의 설명이다.

어째서 김성한 전 감독은 리오스가 못 미더웠을까.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구단 관계자는 한 예로 “(김 전 감독은) 리오스가 잘 던지고 들어와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사실일까. 지금은 지휘봉 대신 마이크를 잡고 있는 김 전 감독에게 그러한 평가가 사실인지 물었다.

“리오스가 훌륭한 투수이기는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경기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활동이 미미했다.” 김 전 감독은 다른 이유보다 큰 경기에 약한 리오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외국인선수는 외국인선수일 뿐이다”라며 “리오스는 자기 맘대로 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면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니까 ‘코드 차이’였다.

김 전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 “리오스는 사고뭉치였다. 두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김 전 감독의 생각뿐이겠는가. 국내 감독 가운데 외국인선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긴 외국인선수들도 한국 감독을 가리켜 “매니저가 아니라 왕이 따로 없다”며 고개를 흔들기 일쑤다.

KIA 코치였던 한 야구인은 “김 전 감독은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리오스같은 외국인선수는 국내선수들과는 다른 훈련법과 마인드를 갖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보다 ‘왜 너는 한국선수들과 똑같이 하지 않는 것이냐’고 강제했던 게 ‘코드 차이’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은 2004년 7월 성적부진으로 중도하차한다. 그렇다고 리오스의 입지가 달라진 건 없었다. 왜냐하면 2005년엔 리오스가 반드시 퇴출돼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리오스가 두산으로 트레이드 된 다음날. KIA 정재공 단장이 팬들과 대화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정단장은 “2004시즌 뒤 리오스에게 2년 계약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은퇴 후 코치직도 제안했지만 우리 제의를 거절하며 1년 계약만을 수용했다”고 털어놨다. 정단장 말대로라면 ‘외국인선수 계약기간은 무조건 1년으로 한정한다’는 프로야구 규약을 어기면서까지 리오스를 잡으려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단장의 발언이 뒤집히는 데는 하루도 필요하지 않았다. 리오스가 “2년 계약이 아니라 ‘1년 계약에 1년 옵션’을 제의받았다”며 “KIA의 제시안에는 2년째에 구단이 재계약을 포기할 경우 바이아웃 등 보상금도 전혀 설명돼 있지 않았을뿐더러 윈터리그 등 타 리그에도 뛰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고 밝힌 것이다.

외국인선수에게 2년째 확실한 보장도 해주지 않으면서 타 리그에서 뛰지 말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노예계약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트레이드에는 리오스의 부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게다가 리오스의 뒤를 이를 외국인선수로 세스 그레이싱어가 대기하고 있던 것도 불행이었다.

두산에서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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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으로 이적한 리오스는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았다. 우려쪽에 무게를 두는 전문가들은 전반기 성적을 예로 들었다. 리오스는 전반기 19경기에 선발로 나가 113⅔이닝을 던지며 6승10패 평균자책점 5.23을 거두는 데 그쳤다. 피출루율은 무려 3할8푼1리였고 WHIP는 무려 1.54였다. 게다가 피안타 140개, 피홈런 17개는 웬만한 선발투수가 한시즌을 통틀어도 내주기 힘든 처참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리오스의 두산행을 부활로 가는 계단으로 평가했던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MBC 허구연 해설위원이었다. 허위원은 당시 “리오스가 광주구장보다 상대적으로 넓은 잠실구장과 탄탄한 두산 수비진의 덕을 크게 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광주구장의 외야펜스는 좌·우 97m, 중앙 113m 규모로 ‘홈런공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KIA 수비진 역시 ‘알까기 공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실책에 익숙해 있었다. 우려와 기대가 뒤섞인 가운데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는 기대 쪽이 맞았다.

리오스는 전반기 때 리오스가 아니라 2004년 가장 좋았을 때의 리오스로 돌아갔다. 후반기 13경기에 나와 91⅔이닝을 던지며 9승2패 평균자책점 1.37을 기록한 것이다. 피홈런은 전반기보다 14개가 줄어든 단 3개. WHIP는 특급투수들이나 기록하는 0.93에 불과했다.

넓은 잠실구장과 손시헌이 이끄는 골든글러브급 두산 수비진은 리오스의 투구에 확실히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는 후반기 9이닝당 삼진수 7.5개와 이닝당 투구수 14개가 증명해준다. 전반기 KIA에 있을 때 리오스는 9이닝당 삼진수가 5.6개였고 이닝당 투구수는 16.3개에 이르렀다. 언제 홈런을 맞거나 야수의 실책이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투수는 공격보다는 도망가는 피칭을 하기 마련이다.

용병 혹은 외국인선수

일본은 한때 외국인선수를 가리켜 ‘가이진(外人)’이라고 불렀다. 듣기에는 외국인의 줄임말 같지만 실은 ‘이방인’이라는 차별적 의미가 담긴 단어다. 일본 아이들 사이에서는 ‘외계인’과 동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차별도 많이 했다. 과거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며 2차례나 타격 3관왕을 차지했던 랜디 바스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여전히 ‘가이진’인 바스일 뿐이다”라며 소외감을 나타낸 적이 있다. 일본프로야구 외국인타자 가운데 역대 최고로 손꼽히는 터피 로즈는 2001년 긴데쓰 버팔로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뛰며 55홈런을 때리지만 더 이상의 홈런은 기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로즈가 홈런을 1개라도 더 치면 오 사다하루의 기존 시즌 홈런기록 55개가 깨지기 때문이었다.

한국도 일본에 뒤지지 않는 외국인선수 차별이 심한 나라다. 한국은 외국인선수를 가리켜 ‘용병(傭兵)’이라고 한다. ‘돈을 주고 고용한 병사’라는 의미의 용병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간 스포츠 경기를 ‘전투’로 칭하고 국가대표팀을 감독의 성향을 따 ‘함대’ ‘사단’으로 표현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철지난 군사문화는 교과서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스포츠만은 예외인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인 군사문화에서 용병의 가치는 오직 성적으로만 판단된다. 다른 건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233명의 외국인선수 가운데 부상을 숨기며 뛰었던 선수가 부지기수다. 국내 감독들이 외국인선수를 관리할 때 주로 쓰는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짐을 싸게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이승엽(요미우리)이나 이병규(주니치)가 그와 같은 말을 들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장 해당 구단의 사이트가 다운될 것이다.
외국인선수는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도 한국프로야구의 엄연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주인공들이고 이들의 목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

2000년대 들어 2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진 선수는 리오스와 게리 레스(전 두산)뿐이다. 게다가 리오스는 2003~2006년까지 한시즌 투구수를 3천개이상 기록했다. 4시즌 연속 3천개 이상을 던진 투수 역시 리오스가 유일하다. ‘외국인투수 혹사’라고 불러도 할 말 없다. 2000년 이후 시즌 투구이닝 1~4위는 모두 외국인투수의 몫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리오스의 어깨가 아니라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리오스의 통역을 맡고 있는 이창규 씨는 리오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인기록보다는 팀 성적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 지난해 리그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이 던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했다. 자기가 팀에 보탬이 된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는 투수다”

SPORTS2.0 제 46호(발행일 4월 9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