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베어스

그라운드를 지배한 2인자 김상진

민우아빠 2007. 5. 18. 16:53

통산 13년 122승 100패 14세이브 방어율 3.54
베어스 8년 88승 71패 12세이브 방어율 3.11

이상훈 정민철과 함께 포스트 선동렬을 다투며 리그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영원한 내 마음속 에이스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수만명의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현기증 날 듯한 포근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1995년 여름, 주말이면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 역은 내려서는 순간부터 사람의 파도로 술렁거리곤 했다. 그리고 따로 방향과 출구를 선택할 것도 없이 흘러나온 입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잔 개울들이 만나는 바다처럼 아득했다.

사람의 바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그늘마다 자리 잡고 앉아 김밥과 설탕 꽈배기에 얼음물병 따위를 파는 아주머니들부터 풍선이며 호루라기를 흔들고 불며 정신을 빼놓는 아저씨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지정석 5만원' 따위를 외치는 암표쟁이까지. 끝없는 물결과 파도.

잠실 라이벌, 이상훈-김상진 맞붙던 날엔

▲ 연습생 출신으로 90년대 베어스 에이스 반열에 오른 김상진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2007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더구나 서울을 연고로 한 두 팀 트윈스와 베어스가 맞붙는 경기라면, 그것도 두 팀의 에이스 '야생마' 이상훈과 '배트맨' 김상진이 맞붙는 경기라면, 아무리 일찍부터 서두른다고 해도 경기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매표구 앞에 주저앉아 안에서 새어나오는 함성에 곁눈질이나 하며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했던, 혹은 암표라도 사자느니 말자느니 투닥거리다가 퉁퉁 부어서 다시 전철표를 끊어야 했던 이들이 매주 수천은 넘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서두른 끝에 들어선 야구장에서는, 선수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경기가 시작되곤 했다.

1루 쪽과 3루 쪽에 들어찬 사람들은 파란 잔디 그라운드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고, 소리를 모아 노래를 불렀고, 그 걸로도 모자라면 파도를 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1루 쪽에서 시작된 파도가 외야를 돌아 3루까지 휩쓸었고, 그렇게 한 바퀴 돌며 3만명의 기를 흡수한 파도는 다시 경쟁이라도 하듯 높아진 파고로 1루를, 외야와 3루를 지나 두 바퀴, 세 바퀴 달리고 또 달렸다.

드디어 선수들이 하나 둘 그라운드로 들어서고, 여기저기서 몸을 풀고 캐치볼을 하면 다시 하나하나 선수들 이름이 불려지고, 곳곳에서는 그물망 틈으로 사인을 부탁하는 손길이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기, 저기' 하는 목소리가 큰일이라도 난 듯 어딘가를 가리키면 그 곳에는 이상훈, 그리고 김상진이 점퍼도 벗지 않은 채 덕아웃 앞을 유유히 달리곤 했다.

"김상진, 김상진" "이상훈, 이상훈"

이기고 지는 것이 목소리로 갈라지기라도 한다는 듯 한목소리로 외치다 보면, 그 둥그런 잠실 야구장은 복잡했던 바깥세상과는 갈라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먼 외계의 낙원을 향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의 현기증. 그리고 포근함. 그 모순.

현기증, 포근함... 야구장은 낙원으로 떠올랐다

▲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김상진
ⓒ2007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지금은 마산 제일고로 이름이 바뀐 청강고는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전국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 적도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이름 대면 알 만한 선배 선수도 없었다.

89년에 청강고를 졸업한 김상진이라는 투수에 주목하는 프로팀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야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김상진은 서울로 올라와 연습생으로 OB 베어스에 들어갔고, 두 해 동안 정식 선수 등록도 하지 못한 채 배팅볼을 던졌다.

원년 우승팀이라는 자존심이 채 바래지 않았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베어스는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88년부터 4위권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90년과 91년에는 2년 연속 꼴찌로 추락했고, 박철순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무너져버린 마운드는 어디부터 추슬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황폐화된 투수진 덕분에, 91년에 김상진은 드디어 정식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베어스에서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선발투수는 단 두 명이었다. 89년에 입단해 선수 인생에서 단 한 번 10승을 올렸던 김동현, 그리고 마찬가지로 10승을 기록한 연습생 출신의 신인 김상진이 바로 그들이었다.

대개 연습생 출신 투수들이 그렇듯, 김상진 역시 묵직한 직구를 가지고 있었다. 182㎝의 훤칠한 체격, 그리고 그 체격에서 나온 힘을 온전히 공에 실어 던질 수 있었던 역동적인 투구 폼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숙하나마 시속 140㎞대 후반을 유지하는 강속구를 뿌릴 수 있었다.

특히 강한 어깨보다도 좋은 투구 폼에서 나오는 강속구는 공 끝이 좋다. 공이 꿈틀거리듯 움직이며 마지막까지 속도를 놓치지 않고, 타자의 눈앞에서는 조금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시속 140㎞ 후반대쯤 되면 가운데로만 찔러 넣어도 때려내기 어려운 공이 되는데, 김상진의 공은 바로 그런 공이었다. 물론 이름 없는 신인투수의 공이라고 우습게 보던 타자들의 눈은 더욱 빠르게 스쳐 지나곤 했다.

연습생 김상진, 야구장을 지배했다

김상진은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바닥을 치고 다지는 팀 성적에도 해마다 열 번 이상 승리를 잡아냈다. 150이닝 이상 소화하며 2~3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는 꾸준한 활약이었다.

그리고 95년, 김상진은 정점에 올라섰다. 그 해 그가 이룬 업적은 선배 박철순 앞에 내놓고 자랑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209이닝을 던지면서 17번의 승리, 그리고 그 중에 13번의 완투와 3연속 완봉승을 비롯한 8번의 완봉승. 86년의 선동열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한 시즌에 8번의 완봉승을 기록하지 못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최소한 수십 년은 그 자리에 이름을 덧붙일 투수가 없을 것이다.

그 해 김상진은, 그야말로 야구장을 지배했고, 팬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크지도 않고 치켜 올라가지도 못한 선한 눈매를 가리려고 나비 모양의 뿔테 안경을 썼던 그를, 팬들은 '배트맨'이라고 불렀다. 팀이 연패에라도 빠지려고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혼자 힘으로 상대 타자들을 줄줄이 무릎 꿇리고 경기를 마무리 짓는 영웅.

열일곱 번, 그의 승리는 매번 연패의 종착점이었고, 연승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활약을 시작으로, 그해 한때 서울 라이벌 트윈스에게 여섯 경기 이상 떨어졌던 베어스는 후반 들어 연승을 거듭하며 그 경기 차를 뒤집어버렸다.

시즌이 끝나는 순간, 베어스는 반 경기 차로,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트윈스를 밀어내고 1위로 한국시리즈 직행을 결정지었고, 그 기세는 그대로 13년 만의 정상탈환이라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운명의 라이벌, 이상훈을 만나다

▲ 삼성 라이온즈 시절 김상진(왼쪽)과 LG트윈스 시절 이상훈 투구 모습
ⓒ2007 삼성라이온즈/LG트윈스 홈페이지
그러나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던 그 해 겨울, 김상진이 들어올릴 수 있는 트로피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다승 2위, 평균자책점 3위, 그리고 탈삼진 3위. 다승은 이상훈, 평균자책점은 조계현, 탈삼진은 이대진의 몫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존재는 이상훈이었다.

그 해 이상훈과 김상진은 한국야구의 마운드를 양분하는 에이스였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에이스가 맞붙는 경기는, 웬만한 극성 야구팬이 아니고는 잠실로 나가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진풍경을 연출하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존재감과 피하지 않는 세 번의 정면충돌은, 그 앞으로도 뒤로도 다가갈 수 없는 관중 540만 시대의 핵심요소였다.

그러나 그들이 맞붙었던 세 번의 대결에서 김상진은 뼈아픈 세 번의 패전을 안아야 했고, 반대로 이상훈은 빛나는 세 번의 승리를 전리품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훈은 김상진이 거두었던 17번의 승리 위에, 보란 듯 그 세 번의 승수를 보태 20승을 달성하고 말았다. 그 해 투수부문 골든글러브의 주인 역시, 85년 김시진과 김일융 이후 10년 만에 선발 20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이상훈의 것이었다.

김상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고도 '1인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진은 90년대 최고의 선발투수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선동열과 이상훈이 일본으로 떠나고, 이대진이 부상으로 주저앉은 동안에도 꾸준히 해마다 두자릿수 승리를 쌓아올렸고, 컨디션이 좋은 해는 2점대, 부상이 있는 해는 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했다. 90년대 10년 동안 선발투수 한 자리를 그만큼 든든하게 채워준 투수는 정민철과 정민태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최고'가 되지 못했지만 묵묵한 근육

가장 거대한 존재였지만 '최고'라고 불리지 못했고 내세울 만한 타이틀 하나 챙기지 못했던 것. 그것은 한용덕이 그랬고, 또 송유석이, 최창호가 그랬던 연습생 출신 스타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흐릿한 조명등 밑에서 다진 묵묵한 근육의 작용방식이라는 점에서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더는 없을 것 같은 절정의 순간이 내일도 모레도 이어지는 긴 시즌. 그리고 다음해도, 그 다음해에도 또다시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꾸준함의 가치와 존재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재들이 보여주는 눈부신 폭발에 매료되고, 감탄하고, 다시 아쉬워하는 반면 해마다 당연한 듯한 자리를 채워온 뚝심의 영웅들에게 감동하고, 다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세월을 두고 느껴가는 프로야구의 매력이란, 아마도 김상진 같은 이름을 떠올리고 되새길 때 느껴지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펌]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님..